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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그날의 기록

2018년 8월 15일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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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그날의 기록

광복절의 한자는 光( 빛광:어둠을 물리치는 빛)  復(회복할 복, 되돌리다)으로  빛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일제강점기,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1945년 8월 15일 빛을 다시 찾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광복절은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입니다. 그러나 광복절 관련 기사나 자료 중에는 정확하지 않은 사료나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광복절과 관련하여 우리가 착각하고 있고 몰랐던 역사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사진이 맞을까? 

▲광복절 관련 자료에 등장하는 사진. 그러나 이 사진이 1945년 8월 15일 촬영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광복절 관련 기사나 방송 등에 자주 사용하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이 1945년 8월 15일에 촬영됐는지 의구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모습이라는 사진이 언제 촬영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의 ‘사진으로 보는 한국 100년: 1876~1978′(1978년 발행)에는 ‘옥문이 열리던 날 8·15 조국 해방은 옥중 독립투사들에게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출옥 애국인사들과 이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던 독립투사들이 풀려나 기쁨의 만세를 부른 것은 맞지만, 이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의 모습이라고 나와 있는 사진들. 그러나 촬영된 날짜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서울역에서 기뻐하는 모습’으로 알고 있고, 단기4278년 8월 15일이라고 표기된 이 사진은 실제로는 1945년 8월 16일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광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사진도 실제로는 촬영 날짜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현재까지 1945년 8월 15일 모습을 촬영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증받은 사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만세 소리는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사진이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종전을 알리는 일본 천황의 육성 방송이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나왔는데 왜 조선인들은 해방을 몰랐을까요? (천황의 목소리가 담긴 방송을 가리켜 일본은 ‘옥음 방송’이라고 부르고, 대한민국에서는 ‘항복 방송’ 또는 ‘항복 선언’이라고 지칭한다.)

▲1945년 해방 당시 라디오 수신기 등록대수는 조선인 19만 2931대, 일본인 13만 1758대였다.

1940년대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언론은 라디오와 신문이 유일했습니다. 해방 당시 라디오 보급률을 보면 일본인들은 71.8%였지만, 조선인은 겨우 3.7%만이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라디오를 들었다고 쳐도 일본 천황의 육성 방송은 목소리 상태가 좋지 않았고, 일본 황실어를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인 방송 기술자들과 아나운서들이 해설방송을 반복해서 해줬기 때문에 겨우 해방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자 《매일신문》. 패전이나 항복이라는 표현 대신 평화재건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1945년 당시 대부분의 신문은 폐간됐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우리말 신문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였습니다.(자매지 경성일보는 일본어 신문)

1945년 8월 15일 <매일신보>는 ‘평화재건(平和再建)에 대조환발(大詔渙發)’이라는 제목으로 천황의 조서를 일본어로 게재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자, 조선, 일본, 미국 신문>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영국, 중국, 소비에트 4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매일신문>
‘전쟁종결에 대해 왕이 내리는 명령. 4국의 선언수락’ <일본 아사히 신문>
일본 항복, 전쟁 끝! 위협과 욕심으로부터 지배당했던 영토들도 해방될 것이다. 한국의 독립 또한 약속되었다.<미국 뉴욕 타임즈>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도 자매지였던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도 일본이 항복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던 ‘포츠담 선언’에 대해서도 마치 천황이 평화를 위해 수락했다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언론이 통제된 조선인들은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이 아닌 그저 평화를 위해 종전이 됐다는 식으로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15일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8월 15일 해방이 됐어도, 일본군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무장한 일본군(좌) 미군에 의해 무장 해제 당하는 일본군 (우) ⓒLIFE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으니 일본군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해방된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장을 하고 조선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즈음 조선 총독부와 조선 주둔 일본군은 여운형의 건군준비위원회에(건준) 치안권 등에 대해 합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가 훈령으로 미국 군대 이외에는 그 누구도 권한을 이양하지 말라고 지시하자 돌변했습니다.

일본군은 건준이 치안과 권력을 접수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고, 무장한 일본군 등을 동원해 조선인들을 계속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해방됐지만 일본군이 계속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반발하여 유혈 충돌이 일어났지만, 조선 총독부와 일본군은 하지 중장에게 건준이 소련과 손을 잡고 있다는 식의 정치 공작을 펼쳐 미군의 지지를 받으며 무장을 유지했습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는 미군이 조선에 진주한 9월 9일 이후부터 순차적으로 시작됐습니다. 9월 12일 17방면 군사령부 해체를 시작으로 철수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무기와 탄약을 미군의 감독하에 파기하거나 바다에 버렸습니다.

조선지도자들이 일본군의 무장에 대한 자위권과 조선 국군을 만들기 위해 시도했던 ‘국군준비대’는 미군정에 의해 모두 해산당했습니다. 오히려 하지 중장은 일본군 출신을 우대하여 ‘조선국방경비대’에는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이 대거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총독부 건물에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걸렸다

▲조선총독부 건물 앞 게양대에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고 경례를 하고 있는 미군(좌) 해방이 됐지만 조선총독부에 일장기가 걸려있자, 남산에 태극기를 거는 모습 (8월 25일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지만, 수탈과 억압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는 여전히 일장기가 게양됐습니다.

일장기가 내려진 것은 미군이 진주하고 조선 총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9일입니다. 그러나 게양된 것은 태극기가 아닌 미국의 성조기였습니다.

미군을 가리켜 ‘해방군’이라고 생각했지만,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 나왔듯이 조선에 온 미군은 ‘점령군’이었습니다.

<맥아더 포고문 제1호>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서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戰捷軍은 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

第3條 주민은 본관 及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卽速히 복종할 사.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 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함.

오키나와 주둔 24군단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 중장은 조선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이유 만으로 미군정청 최고 통치자가 됐습니다.

존 하지 중장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교활한 종자”(The Koreans are the same breed of cats as the Japs)”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아시아 정세와 조선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존 하지 중장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보다 조선총독부를 더 신뢰했고,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친일파 등을 동원하여 그저 군정만을 유지하기 급급했습니다.

존 하지 중장의 미군정 통치기간에 친일파들이 대거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해방이 되면 일제에 충성하며 같은 민족을 고문하고 괴롭혔던 친일파들이 무너지고, 제대로 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친일파들은 여전히 권력을 장악했으며 ‘불령선인’이라는 말 대신’빨갱이’라는 말로 독립지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도 총독부 건물에는 태극기 대신 성조기가 걸렸고, 미군정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보다는 점령군의 역할에만 몰두했습니다.

미군정은 어두운 대한민국에 한줄기 빛을 선사하려고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독립투사의 순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하나의 단체로 취급했습니다.

해방이 되고 뒤늦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지만, 남한은 미군정과 친일파의 손에 점령됐습니다.

광복절을 그저 일본에 해방이 된 날로 기억하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을 제대로 알았으면 합니다.  광복절과 연관된 역사를 제대로 앎으로 다시는 이 땅에 비참하고 억울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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