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만약,1979년에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2012년 9월 14일

만약,1979년에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박근혜5.16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인혁당’,’5.16 군사 쿠데타’ 등에 관한 발언으로 언론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근혜 후보는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에 출연해 박 후보는 “(유신과 5ㆍ16의 경우)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만약에 내가 지도자였다면, 이런 입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생각하며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며 “그런 부분은 객관적으로 역사가 판단해 나아가지 않겠나. 그것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 후보는 특히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셨다”며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은 박근혜 후보의 말과 너무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박정희가 과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떳떳했던 인물인지, 그가 죽었던 1979년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우리 각자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79년, 그 암울했던 경제 상황’

박정희를 일컬어 산업화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칭찬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럴 순 있습니다. (그 당시 독재자들이 어느 정도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키웠던 시대 상황으로만 본다면) 그러나 그가 죽었던 1979년을 보면 산업화의 장본인, 경제 성장의 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 1979년 6월4일자 동아일보 기사
▲ 1979년 6월4일자 동아일보 기사

1979년은 서민을 비롯한 자영업자, 중소기업 모두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6월인데도 벌써 ‘물가 연말억제선’이 무너졌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1979년 5월 도매 물가는 10.5%,소비자 물가는 2.3%의 상승률을 기록해 정부가 정해놓은 물가억제선 도매 10%, 소비자 12%를 모두 넘었습니다.

1978년은 식료품가격이 올라 물가인상으로 서민이 고통받았다면, 1979년은 수입원자재와 공산품까지도 가격이 올라, 소상공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경제011979년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나빠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2차 오일쇼크가 왔던 요인도 있지만,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까지 올라가 버렸습니다. 가장 문제가 됐던 점은 바로 부동산 투기로 인한 빈부격차가 최고조로 달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는 1979년 토지가격을 무려 49%나 급등하게 했고, 이 때문에 집 없는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박정희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의 인력을 대거 도시로 끌고 와 나라 경제를 살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그의 정권 통치기간 내내 소모품으로 살면서 일의 대가조차 받지 못하고, 도시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박정희의 산업화가 왜 문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재벌만을 위했던 그의 경제 정책입니다.

박정희재벌경제011979년 대한민국 제조업 출하액을 보면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 10대 재벌의 경우 22.7%,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였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정경유착을 통해 정치자금을 받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1961년부터 잘살아보세를 외쳤지만 18년 동안 재벌만 잘살았던 것입니다.)

재벌은 특혜 금융을 통해 자신들의 재산은 늘렸지만,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아 사회 빈부의 격차를 늘려놓았습니다. 아직도 박정희의 산업화 때문에 잘살게 됐다고 믿는 사람을 보면 ‘당신이 아닌, 재벌이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당시 경제는 재벌을 위한,재벌만의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1978년에 발생한 삼성조선의 '산업스파이'사건, 삼성조선은 대한조선공사의 설계도와 기밀 서류를 빼돌리다 적발됐다.출처:1978년 4월17일자 동아일보
▲1978년에 발생한 삼성조선의 ‘산업스파이’사건, 삼성조선은 대한조선공사의 설계도와 기밀 서류를 빼돌리다 적발됐다.출처:1978년 4월17일자 동아일보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당시 재벌들이 정부 보증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상위 5대 재벌이 되느냐 10대 재벌이 되느냐가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재벌들이 자기 자본 없이 무조건 정부의 금융특혜로 기업을 키웠는데, 당시 중화학산업의 평균자기자본비율은 22%에 불과했고, 1979년 5월은 총투자규모의 30%가 투자 보류 내지는 중지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재벌이 정당하게 기업 활동을 했다면 박정희의 산업화가 인정을 받았겠지만, 정치자금을 내고 금융 특혜를 받으며, 기술력보다는 비리를 통해 재산을 늘리면서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 재벌의 모습은 독재국가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에 불과했습니다.

▲ 1965년부터 1983년까지의 물가지수. 출처:통계청
▲ 1965년부터 1983년까지의 물가지수. 출처:통계청

1970년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물가는 점점 가면 갈수록 서민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경제 성장률은 1976년 14.1%,1977년 12.2%였다가 1978년 9.7%로 계속 내려갔습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1979년 경제성장률은 6.5%였고, 국가채무는 200억 달러를 넘어 국가부도 사태까지 제기될 정도였습니다.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어도, 그는 결국 국가 경제의 부도로 하야했을 정도로 당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박정희의 죽음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1979년 ‘부마항쟁’입니다. 이 부마항쟁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재 여부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통치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의 구호와 신민당사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는 여공들.경찰의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의 구호와 신민당사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는 여공들.경찰의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부마항쟁을 김영삼 제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YH무역 여공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YH무역이 공장문을 닫아 기숙사에서 잠자던 여공들이 쫓겨 나와 간 곳이 신민당사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정치를 통해 유신독재의 경제정책 결과인 배고픔을 탈출하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자가 야당과 연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민당사를 공격했고, 경찰진압과정에서 숨진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을 절대 언론에 보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산업화를 칭송하는 이들은 당시 배부른 돼지는 서민이 아닌 재벌뿐이었고, 대한민국 노동자와 서민은 굶주림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예였다는 사실을 절대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필자가 앞서 1979년 경제 상황을 말한 이유는 박정희가 만든 경제허상의 실체를 국민이 인식하고 반발하는 시점이 1979년이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공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지불…극심한 소득분배의 불 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10월16일 부산대 선언문 중에서

김영삼의 제명 이후 불거진 부마항쟁은 유신이라는 정치적 독재 상황도 중요했지만, 당시 대다수 국민의 삶이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점도 원인으로 봐야 합니다.

▲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김탁돈
▲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김탁돈

재벌과 박정희 산업화의 노예로 전락했던 국민이 경제허상을 자각하고 일어서는 시점에서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단순히 위수령과 비상계엄령 등의 무력통치로 진압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것이 그동안 일어났던 학생운동과 본질에서 차원이 다른 사태라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 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 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김재규의 증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학생데모가 아닌 민란으로 규정했을 정도입니다. 만약 10.26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물가고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발생한 부마항쟁의 끝은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다시 전국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고, 이는 4.19처럼 박정희가 하야하는 사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굶주리고 억압받는 국민이 자유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데 총을 쏘겠다는 자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재라고 해야 하는가?
▲굶주리고 억압받는 국민이 자유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데 총을 쏘겠다는 자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재라고 해야 하는가?

김재규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며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아마 광화문 네거리는 피바다가 됐을 것이고, 무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차지철을 통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최악의 학살을 자행했을 것입니다.

1979년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어설 수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재벌과의 정경유착으로 정치자금 모으기, 언론통제를 통한 우민화 정책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유신체제를 위한 사법 살인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권을 국민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고, 이는 그가 죽음으로 끝이 났었을 뿐입니다.

‘박정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가 유신을 종식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그를 판단한다면, 박정희는 결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권이양을 하겠다던 박정희의 기자회견,출처:동아일보
▲정권이양을 하겠다던 박정희의 기자회견,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해부터 국민에게 거짓말을 누차 반복했던 독재자였습니다. 군사혁명정부는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떠나겠다고 했지만, 그의 말은 채 1년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됐습니다.

○ 혁명정부가 사용했던 복지국가

지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내거는 공약 중에 복지국가, 경제 민주화가 있습니다. 그 말의 어원은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혁명정부 기자 회견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복지국가라는 말을 항상 사용했는데, 그가 복지를 “국민의 기본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경제생활에 국민이 그들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유신체제에서 국민의 기본인권이 지켜진 적이 있습니까? 인혁당 사건만 봐도 명백한 사법살인이었습니다. 고문과 투옥, 언론통제가 이루어진 나라, 재벌에게 특혜를 주고 노동자들은 분신자살과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복지를 내세우며 혁명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복지국가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만든 나라는 억압과 독재, 인권 유린의 땅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사건 8명은 판결이 내려지고 불과 18시간 후에 사형이 집행됐으며,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사건 8명은 판결이 내려지고 불과 18시간 후에 사형이 집행됐으며,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인간의 자유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후보 라디오 연설에서 “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 인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1971년 대통령 담화에서는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떠드는 사람이 추앙하는 박정희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가 언제라도 박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러했습니다. 인혁당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박정희는 형법에 국가원수 모독죄를 제정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 이번이 마지막?

박정희는 군사쿠데타가 끝나자마자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당당히 국민앞에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뻔뻔하게 대통령 선거에 계속 출마했습니다.1971년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 관련 기사 출처:동아일보
▲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 관련 기사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후보 유세연설에서 “이번에 또다시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 총통제를 만들어 박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하련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여러분에게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둔다.”라며 ‘이번이 마지막 대통령 출마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해 6년 연임제를 통과시키고,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5선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이라고 외쳤던 것은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마지막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출처:동아일보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내 재산이 문서로 발견되면, 그 돈을 도시의 판잣집을 기와집으로 고치거나 농민들의 영농자금에 쓰도록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10.27일 전두환은 합수부를 통해 박근혜와 함께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금고2’를 열었고, 여기에서 자기앞 수표 1천만원짜리 수십장, 5백만원짜리 수십장등 9억5천여만 원과 박근혜,박지만,박근영의 적금 통장을 별견했습니다.

전두환은 현금 6억 원은 박근혜에게 줬고, 비자금 장부와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집무실에 있던 ‘금고1’은 박근혜가 챙겼다고 하는데, 과연 그 돈이 얼마인지 아직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사망당시 궁정동 안가의 모습과 MBC드라마에 나온 장면.
▲박정희 사망당시 궁정동 안가의 모습과 MBC드라마에 나온 장면.

필자가 지금 이 나이에 박정희의 죽음을 맞이했다면 9살 어린 나이 때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비밀 안가에서 젊은 여자를 안고 술마시다 죽은 독재자의 죽음을 슬퍼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공과를 말하면서 그를 칭송하며 역사의 판단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점을 그의 공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재벌과 독재자를 위해 밤을 새우며 미싱을 돌린 대가가 ‘배고픔’, ‘인권유린’,’자유의 억압과 탄압’이었는데 무엇을 칭송해야 합니까?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1991년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분석한 책 ‘네 마리의 용’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원인으로 북한의 위협으로 만든 사회적통합과 훈육된 인력, 국가에 대한 인식,엄청난 교육열을 손꼽았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18년간의 독재자였다는 말뿐이었습니다.

▲ 박정희와 전태일 열사 묘비,출처:인터넷
▲ 박정희와 전태일 열사 묘비,출처:인터넷

1979년 박정희가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줄 가능성이나 독재를 끝내겠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일본군인의 단기(短氣:‘한다고 했으면 하는 성격)를 품에 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1979년 국민 대다수가 참고 참다가 마지막으로 일어설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을 어떻게 진압했을지는 뻔합니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다 죽은 두 사람을 보면서 누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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