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온라인 사이트 상단에 <경향신문 기자협회 성명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배치됐습니다.

2019년 12월 13일 경향신문 1면과 22면에 게재 예정이었던 A기업에 대한 기사가 해당 기업의 요청을 받고 삭제됐고,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지회가 이를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기사입니다.

성명서를 보면 A기업은 기사 삭제를 조건으로 협찬금 지급을 약속했고, 사장과 광고국장은 구체적 액수를 언급했습니다. 사장은 기사를 쓴 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동의를 구했고 편집국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당 기자는 사표를 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경향신문 기자들은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12월 19일 기자총회를 열었습니다. 이후 사장과 편집국장, 광고국장은 이번 일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로 했습니다.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지회는 A기업이 약속한 협찬금의 수령 절차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기자협회, 노동조합, 사원주주회가 포함된 내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언론사가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공식 웹사이트에 기사 형태로 알리고 사과한 것은 뜻밖입니다. 하지만 경향신문의 기사 삭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삼성 광고 못 받아 고통받았다는 이동현 경향신문 사장 

▲경향신문 사장들이 장충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에게 보낸 문자 ⓒ뉴스타파
▲경향신문 사장들이 장충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에게 보낸 문자 ⓒ뉴스타파


2018년 4월 25일 <뉴스타파>는 언론인과 주고받은 삼성 장충기 사장 문자를 공개했습니다. 여기에는 경향신문 사장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송영승 전 경향신문 사장은 퇴임 직후인 2015년 6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장충기 사장에게 “오랜 기간 신세 많이 졌다. 그간의 깊은 배려와 도움 마음으로 감사드린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해 12월에도 “지난번 만났을 때 말씀하신 문제 좀 잘 부탁드린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결정되자 이동현 경향신문 사장은 "사장님 합병 성공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보내주신 국수 잘 받았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언론사 사장이 합병 축하 문자를 보낸 것이 부적절하다는 뉴스타파 취재진의 질문에 이 사장은  “인사로 그런 문자를 했던 것 같다. 저는 광고국장을 하다가 사장으로 왔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보도) 이후에 경향신문이 쭉 (삼성) 광고를 못 받아서 굉장히 고통을 받았다. 그걸 푸는 게 제 직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박래용 경향신문 편집국장도 송영승 전 사장의 삼성언론재단 이사 선임 문제로 장충기 사장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송영승, 이동현 사장의 장충기 문자만 보더라도 경향신문이 기업 협찬금을 받고 기사 삭제를 하는 것이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닌 듯 보입니다.

경향신문 기자들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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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경향신문 기자들은 "우리는 부끄럽습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경제부 기자 3명이 5개월 동안 취재하고 기획한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기사가 무산됐기 때문입니다.

< 미디어오늘> 박서연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보면 당시 이기수 편집국장은 “당시 하노이 회담을 앞둔 상태로 정신이 없었다. 구체적이지 않은 기획안 틀이었고, 앞쪽 얘기는 새롭지 않아서 초고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하노이 회담 둘째 날 초고를 보게 됐다. 그런데 제 생각과 멀었고 경향신문이 기획하는 원칙이나 승부 호흡과도 멀었다”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기자들은 “독립언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생존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고는 있나. 경쟁사들은 새로운 조직, 새로운 수익 기반을 실험한다. 왜 독립언론 경향신문이 기업과 정부 눈치를 보며 광고를 얻는 것 밖에는 상상하지 못하는 곳이 됐나”라고 반박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게시한 대자보에는 “이것은 경향신문 안에서 미래와 현재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의 전초전임을 선언한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경향신문은 대기업의 협찬금을 약속 받고 기사를 삭제했습니다.

돈 받고 기사 쓰고 삭제하는 언론 비즈니스, 근절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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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삭제된 기사 리스트를 알려주는 '세이브 뉴스'가 등장했다가 사라진 적이 있습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를 보면 언론사 광고 관계자는 “기껏 광고랑 맞바꿔 내린 기사가 다시 떠 버리니 난리 날 수밖에 없었다”며 '세이브뉴스' 파장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금준경 기자는 "기사를 매개로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한국 언론의 거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도 포털 곳곳에서 기사가 조금씩 수정되거나 삭제되고 있다."며 "이번 해프닝은 한국 언론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시민들은 요즘 세대에도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1면 기사를 삭제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며 황당해합니다. 그러나 이런 언론 비즈니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사라진다고 기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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