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은 투쟁의 노래가 아닙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숨진 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곡입니다.

1982년 2월 광주 망월동 묘지에는 영혼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신랑은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작전으로 도청에서 사망한 윤상원이고, 신부는 학생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하며 노동운동가로 활약하며 1978년 광천동 들불야학을 주도했던 박기순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던 1982년 광주는 수백 명의 5월 항쟁 관련자들이 여전히 감옥에 수감되고 입 밖으로 항쟁을 얘기도 할 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1982년 3월 운암동 황석영씨 집에 황석영,김종률,전용호씨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5월 항쟁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영혼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황석영씨는 이들에게 사람의 영혼을 기리는 창작노래극으로나마 달래자는 제안을 합니다. 전체 구상과 노랫말은 황석영씨가 작곡은 대학가요제 수상 경력을 가진 김종률씨가,전영호씨는 노래 부를 사람을 물색하고 연락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황석영씨는 당시 출판됐던 백기완씨의 시집에서 시를 골라 노랫말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노래극으로 만들었지만, 공연은 운암동 황석영씨 자택 2층이었습니다. 장비는 기타와 장구 ,북, 꽹과리, 징과 빌려온 녹음기가 전부였습니다. 소수의 사람만 황석영씨 집에 모였습니다. 그마저도 담요로 거실 유리창을 모두 막고 공연 관람과 동시에 녹음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날 <넋풀이-빛의 결혼식> 창작노래극 테이프가 완성됐습니다.

이후 윤상원, 박기순 두 사람을 위한 넋풀이에 들어있던 ‘임을 위한 행진곡’ 테이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몰래 전해졌고, 이들은 숨죽이며 그 노래를 불렀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애창곡이 됐습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임을 위한 행진곡 (원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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