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뒤 더욱 그리워하고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노회찬 의원입니다.

지금이야 노무현 대통령을 따르는 사람을 친노라 부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 하지만, 노 대통령의 삶이 매번 대중의 인기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인생 중에서 가장 굴욕적인 장면을 뽑아봤습니다.

가장 많은 계란 세례를 당한 '정치인노무현’

과거 정치인들은 종종 계란 봉변을 당했습니다. 정치적 입장이 다름을 계란 투척으로 항의를 하는 거죠.

노무현 대통령은 유난히도 계란 세례를 많이 받았는데요, 노 대통령이 처음 계란 세례를 받은 것은 1990년 부산역 앞 시민집회에서 입니다.

▲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에서
▲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에서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당시 노무현 의원 ⓒ 김종구

당시 노무현 의원은 3당 합당에 반대했습니다. 3당 합당은 노태우 정권이 여소야대가 되자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만든 정치 야합이었습니다.

노무현 의원은 김영삼 총재가 추진한 3당 합당에 반대했고, 부산 시민들은 왜 반대하느냐며 계란을 던진 겁니다.

2001년 5월 노무현 민주당 고문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을 마친 뒤 노조 사무실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흥분한 노조원들이 노무현 고문을 향해 계란을 투척합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노동자들이야 자기들도 감정이 그렇게 격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


계란세례를 받았지만, 노무현 고문은 ‘노동자가 그럴 수 있다’라며 아주 쿨한 반응을 보입니다.

계란 세례를 받았어도 노동자 입장을 생각했던 그의 성품 때문인지, 2002년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는 다시 부평 공장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다시 계란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삶은 계란이었습니다.

 

▲ 2002년 11월 13일 여의도 둔치공원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가 연설하는 도중 군중들 사이에서 날아온 달걀이 얼굴에 맞고 있다. 이날 농민, 학생 등 집회 참석자 일부가 여야 후보들이 자리잡은 연단을 향해 돌과 달걀을 던지는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후보가 직접 맞은 것은 노 후보가 유일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 2002년 11월 13일 여의도 둔치공원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가 연설하는 도중 군중들 사이에서 날아온 달걀이 얼굴에 맞고 있다. 이날 농민, 학생 등 집회 참석자 일부가 여야 후보들이 자리잡은 연단을 향해 돌과 달걀을 던지는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후보가 직접 맞은 것은 노 후보가 유일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2002년 11월 12일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우리 쌀 지키기 전국 농민대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노무현 후보는 연설 도중 참석자가 던진 계란에 얼굴을 정확히 맞습니다.

노무현 후보는 계란 봉변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닦고 연설을 끝까지 마쳤습니다.

노 후보는 이번에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냐. 계란을 맞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다”라고 웃어넘겼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말이 맞았을까요? 계란을 맞고 난 뒤에 노무현 후보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여론은 결국 노무현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계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부활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2004년 탄핵을 당했지만 기각이 되자, 노사모 회원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부활을 상징한다며 만 개의 계란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인 2009년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때도 보수 회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에서 타고 온 버스를 향해 계란을 던졌습니다.

몇 번이나 계란을 맞고도 일어났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에는 안타까운 선택을 했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청중 없는 공터 연설, '바보 노무현’

▲2000년 4월 부산 강서구 명지시장 주차장에서 홀로 연설하는 노무현 후보. 그의 첫 마디는 '혼자서 말을 하려고 하니까 말이 막혀서 잘 안 나옵니다.'였다. ⓒ유튜브 영상 화면 캡처
▲2000년 4월 부산 강서구 명지시장 주차장에서 홀로 연설하는 노무현 후보. 그의 첫 마디는 '혼자서 말을 하려고 하니까 말이 막혀서 잘 안 나옵니다.'였다. ⓒ유튜브 영상 화면 캡처

2000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은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 강서을에 출마합니다. 종로를 포기하고 부산에 출마하자,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그동안 부산 민원도 여러 차례 해결하고 지역을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기에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부산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 시장 공터에 왔지만, 한 사람의 청중도 없었습니다. 그저 동네 상가에서 '저 사람은 뭐 하는 거야' 하는 구경꾼 몇 명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연설 잘하는 노무현 후보가 ‘뭐라고 하지, 할 말을 잃어버렸는데’라며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허태열 후보는 부산 북강서을 지역 합동연설회장에서 강도 높은 지역감정 발언을 했다. 허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고, 결국 당선됐다. ⓒMBC 뉴스 화면 캡처
▲허태열 후보는 부산 북강서을 지역 합동연설회장에서 강도 높은 지역감정 발언을 했다. 허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고, 결국 당선됐다. ⓒMBC 뉴스 화면 캡처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맞붙었던 후보는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였습니다. 허 후보는 나중에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허 후보는 철저하게 지역감정을 자극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전라도라며 새천년민주당 후보인 노무현 후보를 공격했습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을 이기지 못하고 낙선을 합니다. 하지만 지역감정을 깨뜨리기 위해 계속 도전하는 그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신념 있는 정치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대선 전날 문전박대 당한, '16대 대통령 노무현’

▲2002년 11월 16일 새벽 민주당 노무현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후보가 국회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회담 결과를 발표한 후 얼싸안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11월 16일 새벽 민주당 노무현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후보가 국회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회담 결과를 발표한 후 얼싸안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11월 16일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는 심야 회담을 한 끝에 후보 단일화에 전격 합의합니다. 두 사람의 단일화 합의는 한나라당 이회창 대세론을 깨뜨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됐습니다.

16대 대선 후보 등록을 불과 이틀 앞둔 11월 25일, 노무현-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됩니다.

당시 여론은 노무현 후보가 불리할 것이라며 정몽준 후보가 대선 후보가 된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46.8%로 42.2%의 정몽준 후보를 눌렀습니다.

이제 이회창 후보와의 본선만 남아 있었습니다.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8일,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대표와 공동 유세를 합니다. 노 후보는 ‘지역 갈등을 끝내고,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대한민국 시대를 여는 정치 혁명을 이뤄 달라’며 국민들에게 호소합니다.

노무현 후보는 종로 유세를 마친 후 9시 30분에 동대문에서 다시 정몽준 후보와 공동 유세를 하기로 했지만, 돌연 정몽준 후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투표를 불과 8시간 앞둔 밤 10시경 갑자기 정몽준 후보 측에서는 ‘지지 철회’를 일방적으로 통보합니다.

노무현 후보와 지지자들, 국민들은 허탈감과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은 승기를 잡았다며 환호했습니다. 언론 또한 ‘단일화 파기’를 속보로 내보냈고, 선거는 이제 끝났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8일, 정몽준 후보가 일방적으로 지지를 철회하자 노무현 후보가 정씨의 자택을 찾았다. 그러나 정씨 측은 술을 마시고 자고 있다며 노 후보를 문전박대 한다. ⓒ대선 다큐 '그날' 화면 캡처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8일, 정몽준 후보가 일방적으로 지지를 철회하자 노무현 후보가 정씨의 자택을 찾았다. 그러나 정씨 측은 술을 마시고 자고 있다며 노 후보를 문전박대 한다. ⓒ대선 다큐 '그날' 화면 캡처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 노무현 후보는 평창동 정몽준 씨의 집을 찾아갑니다. 노무현 후보는 추운 겨울날 찬 바람을 맞아가며 정몽준 대표와 만나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몽준 대표는 술을 마시고 잔다며 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무현 후보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쓸쓸히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조선일보의 12월 19일 대선 아침 사설. 이날 조선일보의 사설은 '나라의 운명 결정 짓는 날'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예정된 사설까지 바꾸며 노무현 후보를 공격했다. ⓒ조선일보 PDF
▲조선일보의 12월 19일 대선 아침 사설. 이날 조선일보의 사설은 '나라의 운명 결정 짓는 날'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예정된 사설까지 바꾸며 노무현 후보를 공격했다. ⓒ조선일보 PDF

 

선거 당일, 조선일보는 예정된 사설을 바꿔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라며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합니다.

오전 10시 출구조사를 보면 노무현 후보가 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실제로 대다수 언론과 여론은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노사모 회원들과 지지자들은 핸드폰으로 투표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투표를 독려하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낮 12시가 되면서 젊은 층이 투표장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후가 되면서 투표에 참여했다는 글도 올라왔습니다.

투표가 끝난 뒤 개표 초반에는 이회창 후보가 앞서갔습니다. 초조한 가운데 밤 10시가 넘어서자 방송사들은 ‘노무현 당선 확실’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회창 후보와 불과 2.3% 차이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4주기 추모 영상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 4주기 추모 영상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한 명입니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시민들에게 외면받았지만,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까지 당선됐기 때문입니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곁에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시민과 함께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는 시민들 마음에 영원히 간직될 것입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아이엠피터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