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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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5일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9월 25일 숨진 후 41일 만입니다.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을 돌아 고 백남기 농민이 쉴 곳을 찾아 떠나갑니다.

고 백남기 농민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집니다. 11월 5일 오전 8시 발인을 하고, 9시에는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합니다. 오후 2시에는 물대포를 맞았던 종로1가 르메이에르 빌딩에서 노제를 합니다. 이어 오후 2시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영결식을 할 예정입니다.

영결식이 끝난 후에는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갔다가 보성역과 광주 금남로 노제를 끝으로 11월 6일 오후 5시 광주 망월동 묘역에 안치됩니다.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이 끝나면 그의 죽음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①대한민국의 생명을 외쳤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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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농민 장례식에 사용될 깃발. ‘생명평화 일꾼 백남기’라고 적혀 있다. ⓒ백민주화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두고 누군가는 ‘빨갱이가 공권력에 대항해 죽은 당연한 사건’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남기 농민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보성에서 서울까지 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쌀값 때문이었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딸 민주화씨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쌀값이 너무 많이 떨어져 다른 농민들을 대변해서 그 자리에 말을 하려고 갔던 건데 왜 거기에 나갔는지 본질은 모르고 빨갱이라고 한다”라며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식량자급률은 22.6%입니다. 여기서 쌀을 제외하면 3.7%에 불과합니다. 밥상에 오르는 음식 중 5% 미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국가의 식량자급률은 그 나라의 미래와 생명을 의미합니다. 선진국일수록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유입니다. 백남기 농민은 ‘생명운동’을 이끌며 ‘우리밀 살리기’운동을 했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보성에서 올라온 이유는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②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를 외쳤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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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당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 그는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오마이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후보 시절 17만 원이었던 쌀값을 21만 원으로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2016년 9월 쌀값은 13만원대로 폭락했습니다.

농민의 입장에서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에게 왜 공약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외칠 수 있습니다. 국민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잘못을 지적하는 국민을 향해 경찰은 오히려 물대포를 쐈습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살수차 9호의 미스터리’를 연출한 안윤태 PD는 ‘PD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시청자들이 백남기 농민 사건을 다음과 같이 봐주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백남기 농민 사건이 갖는 의미를 되짚어 보면 좋겠다. 국민의 한 사람이 잘못된 정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집회에 참가해 목소리를 낸 건데, 그렇게 과잉 진압을 한 것은 그 목소리를 안 듣겠다는 거다. 그래서 백남기 농민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고, 단순히 한 사람의 사망으로 보고 말 일이 아니다. 방송에서 표현했듯이 이건(백남기 농민 사망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는 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다. 그래서 방송을 본 국민들이 이런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바꿔 나가려는 노력을 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안윤태 PD, PD저널 인터뷰 중에서)

백남기 농민은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임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스스로 국민의 권리를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③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

▲1980년 5월 14일 백남기를 포함한 중앙대 복학생 9인이 주도한 ‘유신잔당 장례식’ 시위 모습 ⓒ경향신문

1980년 5월 14일 중앙대 복학생이었던 백남기는 ‘유신잔당 장례식’을 치릅니다. 유신철폐 시위 주동자로 수배를 받고 제적됐다가 복학했던 백남기는 자신이 구속될 것을 알면서도 ‘유신잔당 장례식’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후 백남기는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학교로 쳐들어왔을 때 체포됩니다.

국민들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와 군사 정권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절에도 민주주의를 외치며 있었던 이들이 있었고, 그 사람 중의 한 명이 백남기 농민이었습니다.

전쟁에서 군인으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국민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입니다.

주간 경향의 <긴조 9호세대 비화, ‘썩은 문인은 붓대를 꺾어라’> 마지막 부분에는 백남기 농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971년 위수령, 75년 전대련 사건과 관련해 두 차례 제적됐던 백남기는 80년 세 번째 제적된 뒤 12년에 걸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고향 전남 보성으로 내려간다. 원래 농사를 짓는 게 꿈이던 그는 복학을 포기하고 농업에 전념, 지금껏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2004년 6월 주간경향)

아이엠피터는 이 글을 아래처럼 바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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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빕니다. 당신의 죽음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평생의 꿈이었던 농사꾼으로 살고 있던 백남기는 국민의 생명과 권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상경했다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고,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과 동시에 박근혜 정권의 폭력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고, 결국, 박근혜는 하야했다.”

고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빕니다. 당신의 죽음을 꼭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