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763일간의 기록"


2014년 4월 22일,
그림 - 경향신문 김용민 화백의 그림입니다
생때같은 자식 살려내라는 부모 심정이 종북이면 나도 종북이요.
일주일이 다되도록 우왕자왕, 정부가 한게 뭐냐 따지는게 빨갱이면 나는 새빨간 빨갱이요…
참사 1주일,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유가족들을 이렇게 봤습니다.

2. 그리고 참 많은 일이 있었죠. 2014년 9월 14일
망원동 어느 가게 앞입니다. “세월호 잊지 않겠습니다”란 문구로 시민들의 마음은 이어졌습니다.

3. 하지만 2014년 11월 22일 서울시청 분향소가 철거됐습니다.
시민들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결국 공간을 돌려줘야 한다는 일부 여론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분향소가 철거됐습니다.

4. 해가 바뀌었습니다. 2015년 2월 26일
모진 바람이 부는 청와대에서 미수습자 허다윤 양의 부모가 1인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윤이를 찾아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5. 2015년 4월 2일… 결코 잊을 수도, 잊어서는 안되는 날입니다.
참사 1년, 모진 4월이 돌아온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광화문에서 유가족들이 삭발을 했습니다. 기자도, 현장의 시민들도, 유가족도 모두 통곡한 날입니다.

6. 2015년 4월 4일
삭발을 한 가족들이 내린 결정은 무엇일까요. 바로 안산에서부터 광화문까지 희생된 아이들의 영정 사진을 들고 도보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해도 해도 안되니, 국민들께…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 뿐이었습니다. 그날의 1박 2일을 함께 걸으며 찍었던 몇 장의 기록입니다.

7. 2015년 4월 15일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모진 그날이 왔습니다.
참사 전날, 엄마들은 꽃 한 송이 들고 그날 그곳의 현장을 찾았습니다.
아무말도 못하고 다들 울기만 했습니다.

8. 그리고 2015년 4월 16일 참사 1주기
미국 방문을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은 갑자기 팽목을 찾았습니다.
문제는 현장에 유가족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왜 유가족 하나 없는 현장을 찾았을까요?
유가족들은 왜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부했을까요?
이유는 여러분 모두 아실 겁니다.

9 2015년 4월 19일
대통령이 팽목까지 찾았지만 달라진게 있을까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거짓 희망의 모욕감만 줬죠.

가족들은 광화문 72시간 연좌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엄마들은 연행됐고, 연대하려는 시민들은 경찰 차벽에 막혀 물포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농성은 거의 두달 내내 지속됐습니다. 당시 찍은 사진도 함께 보시겠습니다.

10. 2015년 4월 30일입니다
그렇다면 특조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석태 위원장 등 특조위원들이 ‘일 좀 하게 해달라’며 청와대에 항의 방문을 하고 광화문에서 연좌 농성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11. 2015년 5월 2일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경찰이 시민들과 유가족에 맞서 소화전 이용에 물대포용 물차 채우는 장면입니다.
특조위의 농성이 이어지고 가족들의 집회가 계속되던 작년 5월 2일 자정무렵의 안국동 풍경입니다.

12. 그리고 5월 2일 아침입니다.
안국동에서 밤을 샌 유가족들은 청와대로 향하던 중 결국 목줄을 감습니다.
가족들이 어쩌다 목줄까지 감아야할 상황이 됐을까요?

13.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아이들 떠난 자리는 그대로였습니다.
작년 어버이날,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 정예진 양의 방입니다.

14. 5월 18일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아는 걸까요?
작년 5.18일입니다. 광주 어머니, 세월호 부모를 안아주시더라고요.
잘 버티라고, 함께 이겨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15 5월 20일 경…
이런 가운데, 우리 다윤 부모님은 세월호 인양 피켓팅을 청와대에 이어 홍대까지 늘렸습니다.
오전엔 청와대, 오후엔 홍대… 이렇게라도 해야만 다윤이가 빨리 올라오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아픈 몸을 이끌고 거리에 선 겁니다. 작년 5월 20일의 풍경입니다.

16. 6월 12일
한편 승현아빠 이호진씨는 100일의 시간동안 팽목에서부터 광화문을 ‘삼보일배’로 절을 하며 올라왔습니다.
그의 가슴엔 ‘반면교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잘못된 일과 실패를 거울삼아 가르침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17 그리고 2015년 6월 28일
416연대가 창립합니다. 이유는요?
아픈 사람들, 아직 진실규명 밝히지 못했다 생각하는 시민들이 모여 처음 그 약속 대로 잘해보자는 의미로 보입니다.

18. 하지만 현실은…
진실규명을 바라는 국민들의 서명조차 전달이 제한됐습니다.
2015년 6월 30일 청와대 앞 풍경입니다.

19. 이렇게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2015년 9월 14일 미수습자 9인을 위한 세월호 버킷리스트 공연이 홍대에서 열렸습니다. 다윤 엄마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딸을 찾지 못했다는 죄스러움 때문이라 했습니다.

20. 2015년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가 시작됐습니다.
지난 2월까지 총 4번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과정 속에 시민들은 세월호 진상규명과 인양을 외치며 맞섰지만 물포에 맞아 쓰려졌습니다. 1차 민중총궐기 때 물포에 맞아 쓰러진 농민 백남기씨는 6개월이 넘는 지금까지 쓰려져 있습니다. 경찰과 당국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21. 2016년 겨울
하지만 절망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여전히 세월호를 가슴에 품고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딸과 함께 나온 시민 김재진 선생님과 부산 서면에서 700일 넘게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을 위해 힘쓰는 국민티비 조합원들입니다. 시민들은 잊지 않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22. 그리고 지난 4월 16일
세월호 2주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만의 시민이 광화문에 모여 외쳤습니다.
‘’세월호를 인양하라. 진상규명하라”
이날 부천에서 올라온 고3 학생은 자세 한 번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23 5월 5일부터 14일
단원고 기억교실 협약식과 아이들 ‘제적’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가족들은 다시 거리에서 밤샘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단원고 기억교실을 비워주는 협약식이 지난 9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학교와 교육당국이 희생된 아이들을 제적처리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습니다.
부모들은 왜 아이들을 제적처리 했냐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들이 정말로 궁금했던 건, 그 사실을 세달 넘게, 왜 감춰왔냐는 점입니다.
단원고 교장은 끝내 몰랐다는 말로 일축했습니다.
그리고 제적 처리는 큰 논란이 발생하자 취소됐습니다.

5월 17일 녹화일 기준으로 현재까지 세월호 참사 763일의 기록입니다. (국민TV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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