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해 시작된 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가 130시간을 넘겼습니다.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려고 했던 새누리당으로서는 곤혹스럽습니다. 뜻밖에 필리버스터에 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졌고,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이 낱낱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어차피 통과될 텐데'라며 부정적인 의견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필리버스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이고, 과연 정치를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① 대박 시청률, 5공 청문회 이후 처음

필리버스터의 가장 큰 수혜자 중의 하나가 '국회방송'입니다. 한겨레에 따르면 2월 22일 국회방송의 일일 시청률은 0.014%였습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27일의 일일 시청률은 0.283%로 무려 20배나 상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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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웹사이트나 앱에서 제공되는 '인터넷 의사중계 시스템'의 접속자 수도 일일 평균 6천 건에서 24일은 13만51,159건까지 늘어났습니다. 필리버스터를 계속 생중계하고 있는 팩트TV의 23일~25일 누적 접속자 수도 180만 명이 넘었습니다.

TV로 생중계됐던 5공 청문회 이후 이토록 많은 국민이 정치 관련 생중계를 관심 있게 본 적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엄청난 사건이 된 필리버스터의 높은 시청률, 이유는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는 패러디 영상과 이미지가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국회의원들을 아프리카TV라는 인터넷방송의 'BJ'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무리 중요한 방송이라도 재밌지 않으면 보지 않는 시청률의 특징으로 본다면 필리버스터 방송은 재미만으로도 대박 시청률을 기록한 셈입니다.

② 보는 정치에서 소통하고,참여하는 정치로 바뀌다.

5공 청문회 때는 그저 볼 수만 있었습니다. 기껏해야 술자리에서 증인으로 나와 모르쇠로 일관하는 전두환을 비난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온라인 댓글이나 채팅창,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하기 전에 올린 페이스북 글. 댓글이 2,112개, 공유가 504회 이루어졌다.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하기 전에 올린 페이스북 글. 댓글이 2,112개, 공유가 504회 이루어졌다.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필리버스터를 하기 전에 페이스북에 '어떤 내용으로 하면 좋을지 자료 및 의견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은수미 의원의 글에 수백 개의 댓글이 순식간에 달렸습니다. 은 의원은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실시간으로 달린 댓글을 읽으며 시민들의 의견을 알렸습니다.

'필리버스터 릴레이'라는 사이트에서는 시민이 단상에 있는 의원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이미 참여자가 3만5천여 명이 넘었습니다.

정치는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에서 내가 참여함으로 정치가 바뀔 수 있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저 보는 정치가 아니라 참여하고 소통하는 정치로 바뀌고 있습니다.

③ 그저 싸우는 정치가 아닌 논리적인 정치를 알기 원하다.

교수 출신이자 경제 전문가인 홍종학 의원은 국회 단상에 스케치북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수십 장에 달하는 스케치북에는 각종 경제 지표와 차트가 있었습니다.

▲각종 경제 지표를 스케치북으로 만들어 필리버스터에서 공개한 홍종학 의원 ⓒ홍종학 의원실
▲각종 경제 지표를 스케치북으로 만들어 필리버스터에서 공개한 홍종학 의원 ⓒ홍종학 의원실


홍종학 의원실은 홍 의원이 필리버스터에 사용했던 스케치북 자료를 공유 받고 싶다는 민원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블로그에 스케치북 자료를 PDF 파일로 올려놓았습니다.

시민들은 왜 홍종학 의원의 스케치북을 받기 원했을까요? 정확한 자료를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싶고, 제대로 알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비판만 하는 정치, 말로 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자료를 통해 논리적으로 정치를 파악하고 싶어하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④ 올림픽보다 더 높았던 5공 청문회 시청률, 그러나 끝은 허무했다.

1988년 진행됐던 5공 청문회는 올림픽 시청률보다 더 높았습니다. MBC의 낮 12시 시청률이 무려 56%까지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의원은 예리하고 거침없는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88년 진행됐던 5공 청문회의 시청률은 올림픽 때보다 높은 56%까지도 기록했다. ⓒ 동아일보
▲1988년 진행됐던 5공 청문회의 시청률은 올림픽 때보다 높은 56%까지도 기록했다. ⓒ 동아일보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던 5공 청문회, 그러나 끝은 허무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의원은 청문회 도중 명패를 던져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에는 왜 명패를 던졌는지 그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명패투척사건>
내가 청문회로 꼭 덕만 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회복이 안 되고 있을 만큼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일도 있다. 소위 '명패투척사건'이 그것이다. 청문회에 나온 전두환씨가 퇴장할 때 내가 명패를 집어던진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나는 당시 언론에 의해 '국회의원의 자질이 문제'라며 매우 무식하고 경우 없는 깡패(?)로 비난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나에게서 그런 이미지를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물론 그 반대로 "기왕이면 머리통을 정통으로 맞출 일이지 그게 뭐요?" 하면서 통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전두환씨에게 명패를 던진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내동댕이를 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전두환씨에게 대한 분노보다는 당시 내가 소속하고 있던 통일민주당의 지도부에 대해 화가 치밀어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새삼 무슨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으나, 당시 우리가 몸담고 있던 정치 현장의 분위기와 그에 익숙하지 못했던 우리 소장의원들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싶어 그 사건의 전말
을 밝혀 볼까 한다.

청문회로 온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었던 5공 특위와 광주 특위는 89년 1월 민정당의 불참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다 그 해 연말 4당 영수 회담에서 노태우-YS-JP는 정호용씨만 희생양으로 삼는 선에서 5공 특위와 광주 특위 건을 마무리 짓기로 합의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소장 의원들은 지도부의 그런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권당의 반대 때문이라면 청문회가 공전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뒷날에라도 바른 매듭을 지을 수 있지 않은가. 또한, 전두환씨의 청문회 증언 문제도 전두환씨가 서면 질문에 종합적으로 답변하고 보충 질문을 일체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되었다. 한 마디로 전두환씨를 국회로 불러내 일방적인 해명 기회를 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건 법적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국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질문권을 봉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건 청문회가 아니라 전두환씨의 대국민 연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합의에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의 소장 의원들은 반발했다. 그래서 질문권을 계속 주장하기로 하고 작전까지 미리 짜놓았다.

1989년 12월 31일 밤, 전두환씨의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국민들 항의 전화가 빗발친 것을 말할 나위 없다. "저게 증언이냐? 연설이지." "어서 끌어내서 증언대로 앉히지 않고 뭐하냐?" 등등. 국회의원들도 "이렇게 국회가 모독당해도 되느냐"며 모두 흥분했다. 각 당의 원내총무실, 대표실 등을 들락거리며 모두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통일민주당 지도부의 반응이었다. '광주항쟁과 관련된 사안이니 틀림없이 평민당에서 누가 나와 판을 깰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않아도 과격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평민당이 온통 바가지를 뒤집어쓸 것이다. 그러니 우리 당은 절대 항의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이것이 지도부의 지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평민당의 지도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울화를 삼키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전두환씨가 광주 학살 대목에서 "자위권 발동…." 운운하며 거짓말을 늘어놓자, 평민당의 정상용 의원이 참지 못하고 "자위권 발동이 뭐야! 발포명령자 밝혀!"라고 소리치며 앞으로 뛰어나왔고, 동시에 평민당의 이철용 의원이 증언대로 뛰어나가며 "살인자 전두환!" 하며 고함을 질렀다. 순식간에 청문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민정당 의원이 들고일어나 삿대질을 해댔고, 여기에 맞서 평민당 의원들의 맞고함이 시작되었다. 이럴 때는 으레 통일민주당도 일어나 야당 편을 들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뒤쪽 지도부에서 '우리 당은 조용히 있어라. 이제 평민당이 다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식의 의사가 전달되어 오는 게 아닌가.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벌떡 일어나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소동이 가라앉지 않자 전두환씨가 퇴장을 했고, 나는 통일민주당의 지도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명패를 집어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5공 청산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제는 그 당시 내가 명패를 전두환씨를 향해 집어던졌건 통일민주당의 지도부를 향해 집어던졌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사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때 타협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를 다시 밝히고, 역사적 평가도 다시 해야 할 것이다.아무튼, 지금도 나를 보고 그때 왜 전두환씨를 정통으로 맞추지 못했느냐며 농담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출처: 여보 나 좀 도와줘, 노무현 고백에세이, 새터.>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가졌던 5공 청문회였지만, 지도부의 야합으로 제대로 결말을 짓지 못한 상황에 분노했던 노무현 의원은 전두환이 아닌 통일민주당 지도부에 명패를 던진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시민들이 보는 필리버스터도 마찬가지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럴 경우 노무현 의원의 명패투척사건처럼 새누리당이 아닌 야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⑤ 정치는 끝도 승리도 없다. 끊임없는 과정이 중요하다.

아이엠피터는 필리버스터의 높은 시청률만으로 대한민국 정치사에 기록될만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봅니다. 정치블로거로 얼마나 사람들이 정치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어려운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 뉴스는 연예인 이야기만큼 자극적이지 않으면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론들은 항상 낚시 제목으로 시민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시민들은 언론사이 생산하는 자극적인 뉴스보다 생중계되는 필리버스터의 내용에 공감하고 재밌어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이토록 똑똑한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 꼭 투표하겠다고 합니다.

'요즘 진짜 정치의 재발견입니다. 제가 너무 국회의원들을 싸잡아 나쁜놈 취급했다는걸 느끼고 반성합니다. 의원님 같은분이 있다는걸.. 어제 필러는 진짜 말안듣는 진상반 (새누리 )애들 델고 어떻게든 조근조근 무엇이 잘못인지 알려주시는 자상한 선생님 강의 같은 시간이었어요. 이번 총선 응원합니다. 저는 저희지역구에 이번 필러 참여자인 의원님이 한분 계셔서 꼭 선거하려고요~ 더민주. 오랜만에 아니 첨으로 정치 제대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종학 의원 블로그에 달린 댓글 중)

정치전문가들은 3월 10일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국 테러방지법은 통과되기 때문에 고작해야 필리버스터 영웅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엠피터는 정치는 끝도 승리도 없고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시민들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깨닫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을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만, 왜 테러방지법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면 테러방지법이 통과될 수 있는 국회법의 절차를 알지 못했습니다. '직권상정'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몰랐던 시민들이 이제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의 이유로 내세운 '비상사태'가 왜 문제인지 깨달았습니다.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 이후 시민이 만들어준 사진 ⓒ은수미 의원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 이후 시민이 만들어준 사진 ⓒ은수미 의원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비록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고 해도, 우리 시민들은 그 법이 왜 악법이고, 얼마나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이 교묘하게 국정을 운영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아이엠피터는 이것만으로도 시민들의 정치 수준이 조금은 더 나아졌다고 봅니다. 이 정도만 하려고 해도 얼마나 힘든지 정치블로거로 살면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을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시켜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사회입니다. 이런 민주주의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고민하고 토론하고 배우면서 어떤 방식이 좋은지 합의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이번에 승리한다고 계속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권력을 잡아도 함부로 악법을 만들어 헌법에 보장된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지속해서 보완해야 합니다. 정치는 단순히 승패로만 따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승리하겠다는 마음보다 끝까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포기하지 맙시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지만, 국민의 임기는 평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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