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제창 46주년을 기념해 새마을지도자 270명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청와대블로그
▲박근혜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제창 46주년을 기념해 새마을지도자 270명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청와대블로그


해마다 새마을운동 관련 기념일이 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행사를 벌이거나, 새마을운동 지도자를 청와대로 초청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부터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나 관련 행사에서 '제2의 새마을운동'을 제안하거나 강조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2013년에는 “새마을운동은 우리 현대사를 바꿔놓은 정신혁명이었고, 그 국민운동은 우리 국민의식을 변화시키며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습니다. 2016년에는 '새마을운동이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국민통합에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의 제1 치적으로 손꼽히는 새마을운동을 그의 딸인 박근혜가 자랑처럼 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의 기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새마을운동이 현대사를 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이었는지, 제2의 새마을운동을 주장하는 일이 정당한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박근혜 정권과 언론이 말하지 않는 새마을운동의 기원과 문제점이 무엇인지 조사해봤습니다.

' 시멘트 회사를 살렸던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살렸다면서 업적으로 마을 진입로 및 도로 확장, 지붕 개량 공사, 소규모 교량 건설, 공동목욕탕과 빨래터 만들기 등을 내세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업적을 박정희 정권이 모두 해준 것으로 인식하는데, 사실 박정희 정권이 실제로 했던 지원은 새마을운동의 20~30%에 불과했습니다.

▲연도별 새마을운동 재원 지원 내역 ⓒ성공회대새마을운동연구회팀
▲연도별 새마을운동 재원 지원 내역 ⓒ성공회대새마을운동연구회팀


연도별 새마을운동 재원 내역을 보면 1971년 41억 원,1972년 33억 원으로 미비했습니다. 1973년이 되어서야 겨우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215억의 예산이 집행됐습니다.

연도별 재원을 보면 대부분의 새마을운동 예산은 주민이 부담하거나 융자로 충당했고, 정부지원은 새마을운동 사업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1968년 쌍용시멘트 공장을 시찰중인 박정희와 쌍용 김성곤 회장. ⓒ대한뉴스
▲1968년 쌍용시멘트 공장을 시찰중인 박정희와 쌍용 김성곤 회장. ⓒ대한뉴스


박정희는 1970년 10월부터 전국 3만3천개 마을에 300여 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우는 도로 확장과 마을 개량,교량 건설에 필수적이었던 시멘트를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사실을 박정희의 업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속내는 다릅니다.

쌍용시멘트 공장 등이 준공됐지만, 국내 시멘트 소비량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멘트 공장마다 재고가 쌓였습니다. 당시 쌍용시멘트 소유주이자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관리했던 쌍용시멘트 김성곤 회장은 박정희에게 시멘트를 구입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김성곤의 요청에 따라 박정희는 남아도는 시멘트를 부진한 새마을가꾸기 운동에 돌릴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정부는 마을마다 시멘트를 제공해, 새마을사업에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시멘트는 제공됐지만, 개인의 재산과 무상 노동력으로 완성된 새마을운동 ⓒ국가기록원
▲시멘트는 제공됐지만, 개인의 재산과 무상 노동력으로 완성된 새마을운동 ⓒ국가기록원


하지만 농촌에는 시멘트만 내려왔지, 중장비와 건설인력은 보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을 도로 확장과 하천 정비 사업 등은 오로지 마을 사람들의 순수 공짜 노동력으로 완성됐습니다.

지금도 간혹 문제가 되는 것이 개인 땅이지만 새마을운동으로 도로가 된 땅들입니다. 분명 개인 재산이지만 도로를 만들 수 있다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보상은커녕 무조건 도로 만들기에 희생됐습니다. 아직도 농촌에 가보면 맹지나,전이지만 도로로 된 곳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정부가 국가 예산으로 해야 했던 도로포장, 교량 건설 등은 결국 시멘트 업계의 남아도는 시멘트 땡처리와 사유재산, 개인의 무상 노동력으로 완성됐습니다. 새마을운동 때문에 희생된 국민의 노력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박정희의 업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 잘살어보세를 외치며 농촌을 떠난 농민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한 마디로 '잘살아 보세'라고 주장했습니다. 낙후된 농촌마을을 살린 구세주처럼 박정희를 여기지만, 실제 농촌이 잘 살았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생활 환경 개선과 도로,교량 등의 확충은 마을 주민의 노동력과 사유재산이 희생됐으니 박정희의 치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질은 어떠했을까요?

▲1970년대 농촌과 도시가구 소득비교 ⓒ성공회대새마을운동연구회팀
▲1970년대 농촌과 도시가구 소득비교 ⓒ성공회대새마을운동연구회팀


1970년 농가소득은 255,804원으로 도시가구 소득 381,240원의 67%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도시와 농가의 격차는 1974년 농가소득이 674,541원으로 도시가구 소득 644,520원을 넘으면서 오히려 농가소득이 도시가구를 앞지르기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농가소득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중곡가제'를 통해 농민들에게 높은 가격으로 쌀을 수매하여, 노동자의 저임금을 위해 쌀을 낮게 판매했습니다.

정부의 '이중곡가제'로 농민들은 단순히 먹고사는 농사가 아니라 수익을 낼 수 있는 상업적 농업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농가소득과 농가지출 도표. 농민들은 수입이 늘어난만큼 지출과 대출에 대한 융자금도 늘어났다. ⓒ 통합통계시스템, 국가기록원
▲농가소득과 농가지출 도표. 농민들은 수입이 늘어난만큼 지출과 대출에 대한 융자금도 늘어났다. ⓒ 통합통계시스템, 국가기록원


농민의 수입은 늘어났지만, 그만큼 지출도 늘어났습니다. 상업 농업을 하기 위해서는 농기계를 구입하고, 하우스와 같은 시설을 설치하는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979년 농업소득이 1백5십3만1천 원으로 늘어난 만큼 농가지출 가계비도 1백6십6만2천 원 증가했습니다. 농업외 소득이 늘어나서 겨우 적자는 면하고 있지만, 실제로 매달 갚아 나가야 하는 대출 상환 등이 증가했기 때문에 농촌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부채가 없는 집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수도권 인구집중 추이, 1960년대는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 1970년 후반은 해마다 3.7명 도시로 이주 ⓒ 통계청
▲수도권 인구집중 추이, 1960년대는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 1970년 후반은 해마다 3.7명 도시로 이주 ⓒ 통계청


농촌이 진짜 잘살게 됐다면 농민이 굳이 농촌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1960년대 농촌인구 100명 가운데 1.3명만이 농촌을 떠났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의 농민이 농촌을 떠났습니다.

박정희 사망 이전까지의 새마을운동만을 놓고 보더라도, 1970년과 1980년초반까지 계속해서 많은 인구가 농촌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매출은 늘어났지만, 지출과 농가부채도 늘어난 비효율적인 농촌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무조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특히 수출지향 산업화 전략을 취한 박정희는 모자라는 노동력을 위해 농촌에 있던 사람을 도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들은 저임금노동자로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습니다. 박정희가 주장했던 '잘살아 보세'는 국민이 아니라 재벌과 기업주, 독재자가 잘 사는 길이었습니다.

'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새마을운동'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은 선거에 승리하기 위한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박정희는 1969년 삼선개헌과 도시 노동자의 저임금과 노동운동의 여파로 도시에서 인기를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지율이 하락한 박정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농촌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소처럼 부려보자' 등과 같은 현수막과 막걸리를 마시는 뉴스는 농촌에서 박정희를 지지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됐다 ⓒ국가기록원
▲'황소처럼 부려보자' 등과 같은 현수막과 막걸리를 마시는 뉴스는 농촌에서 박정희를 지지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됐다 ⓒ국가기록원


낫을 들고 농민과 벼 베기를 하거나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은 농민들에게 자신과 같은 농민이 대통령까지 됐다는 동질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황소같이 부려보자'라는 구호는 박정희가 대단히 많은 일을 하는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박정희를 비판하는 야당은 일을 못하게 하는 나쁜 놈으로 인식됐습니다. 마치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과 너무 흡사합니다.

박정희는 단순히 보여주는 선거전략뿐만 아니라 새마을운동 사업을 통해 지역 간 차별과 경쟁의식을 조장했습니다. 자신을 지지해야만 마을이 잘 살 수 있다는 교묘한 관권 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마을 승급 단계 기준. 박정희 정권은 마을에 점수를 매겨 등급별로 혜택과 지원을 차별했다. ⓒ성공회대새마을운동연구팀
▲새마을 운동의 마을 승급 단계 기준. 박정희 정권은 마을에 점수를 매겨 등급별로 혜택과 지원을 차별했다. ⓒ성공회대새마을운동연구팀


새마을운동은 모든 마을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전국의 마을 3만5천개 중에서 1만6천 곳에는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을 지원했지만, 나머지 1만8천 개 마을은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지원을 차별한 이유를 새마을운동의 마을 승급 기준에 따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8대 국회의원 선거 때문이었습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찍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관권선거가 교묘하게 자행된 셈입니다.

'박정희의 새마을가꾸기는 조선총독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츠쿠리'가 원조' 

새마을운동은 분명 농촌을 변화시킨 요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근원은 일본이 강제적으로 실시했던 '농촌진흥운동'과 흡사합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유신'이라는 책에서 박정희가 1970년 주장한 '새마을 가꾸기'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서울 지국장도 칼럼을 통해 '새마을 운동의 원조는 일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1937년부터 만 3년 간 교사로 근무했던 문경공립보통학교는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두 곳의 갱생농원을 경영했고, 박정희는 이 농원에 나가 40여 일간 지도를 했다고 한다.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에게 미친 영향을 가장 상세히 기술한 것은 조갑제였다'(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해 교사를 맡았던 경상북도 문경국민학교는 농촌 진흥운동의 인재육성을 위한 지정교였고, 교사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인재육성에 나서 지역의 농장에도 지도에 나섰다. 농업진흥운동의 표어는 새마을 운동과 똑같았다. 당시의 시대 배경에서 '의례간소화'와 '충효애국'도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됐을 때, 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 

박정희가 주장했던 새마을운동은 일본이 농촌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충성을 강요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 시행됐던 정책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유신정권을 만드는 데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조직적으로 충성을 하면 대통령 하사품이나 훈장 등이 내려왔는데, 이는 마치 북한의 김일성이 북한 주민에게 했던 정책과 흡사했다. ⓒ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조직적으로 충성을 하면 대통령 하사품이나 훈장 등이 내려왔는데, 이는 마치 북한의 김일성이 북한 주민에게 했던 정책과 흡사했다. ⓒ 국가기록원


박정희는 새마을지도자라는 사람을 앞세워 마을마다 자신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조직을 운영했고, 이들은 '대통령 각하의 하사품'이나 '새마을 훈장'을 받기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이는 그대로 유신정권과 유신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유신에 불타는 새마을운동의 기수'라는 결의문이 온 국민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새마을운동을 보면, 2016년까지도 이어져야 하는 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013년 10월 20일 KBS뉴스는 시작과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소식을 보도했다. ⓒKBS뉴스 화면 갈무리
▲2013년 10월 20일 KBS뉴스는 시작과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소식을 보도했다. ⓒKBS뉴스 화면 갈무리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다음 해부터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살려서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를 또다시 마련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고 강조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미래지향적인 시민의식 개혁운동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을 말하거나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다시 꺼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마을운동을 시민의식 개혁운동처럼 포장하거나 정부와 언론, 관변 단체 등을 동원한 전략입니다.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새마을운동의 시작은 '새마을가꾸기'이고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가 원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통해 충성심과 국민 통제, 홍보 효과는 성공했을지라도 국민의 삶의 질은 형편없이 낮아지고 희생됐습니다.

정치적 도구로 이용됐던 새마을운동이 그녀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녀가 퇴임한다면 다시 새마을운동 조직이나 지도자를 규합해 전국적인 규모의 활동을 하리라 예상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국민들은 방관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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